Friday, December 3, 2021

[좌담]‘비록 환경운동 25년’ 연재를 마치고 - 주간경향

[좌담]‘비록 환경운동 25년’ 연재를 마치고 - 주간경향

[좌담]‘비록 환경운동 25년’ 연재를 마치고
2007.02.13 00:00

“80년대 환경운동은 민주화운동의 일부였다”



◇ 일시·장소

2월1일 서울 광화문 프레스센터 7층 환경재단
◇ 참석자
구자상 부산환경운동연합 상근공동대표 / 이시재 가톨릭대 교수 / 최열 환경재단 대표(사회) / 
신동호 경향신문 NIE연구소장


‘뉴스메이커’는 지난 1년간 50회에 걸쳐 ‘비록 환경운동 25년’을 연재했다. 장장 200페이지, 약 2000매 분량의 기록은 그동안 잠자고 있던 한국환경운동사에 한 획을 긋는 도전이자 모험이었다. 신동호 경향신문 NIE연구소장이 지역 곳곳을 돌며 발품을 판 피땀의 결정체인 ‘비록 환경운동 25년’은 712호를 마지막으로 잠시 지면에서 모습을 감추게 된다. 1980년대 초창기 환경운동부터 1993년 4월 환경운동연합 태동까지를 정리한 뒤 다음 연재를 기약하게 된 것이다. 신 소장을 비롯해 환경운동계의 거물 3인과 함께 연재물의 의미와 환경운동 역사를 추려봤다.




최열최열 환경재단 대표(이하 최열) | 신 소장께서 꼭 1년간 환경운동사를 정리하셨다. 온몸으로 수고하신 게 눈에 선하다. ‘운동사’를 다루는 건 힘든 작업인데 특히 운동한 사람 스스로 정리한다는 건 더 어렵다. ‘어려운 조건에서 일했다’는 생각도 든다. 50회 연재를 마치며 1993년 4월 (환경운동연합) 태동하는 것까지 다뤘다. 운동가들 스스로 반성하는 계기가 됐고 독자들도 환경운동이 민주화운동과 같은 풀뿌리운동이란 걸 이해했을 것이다. 이번 연재는 1980년대 초부터 1993년까지 환경운동이 대중화되는 단계까지 정리했으니 그 부분에 대해 먼저 화두를 던져달라.

이시재 가톨릭대 교수(이하 이시재) | 환경운동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해야 한다는 생각을 여러 사람이 하고 있었다. 학자들도 마찬가지다. 특히 1980년대 환경운동 자료는 아주 부족하다. 그래서 찾아다니면서 정리해야 하는데 어려운 일이다. 이런 환경 속에서 연재를 무사히 마쳐 의미가 깊다. 사실 ‘민주화운동사’는 있지만 ‘환경운동사’는 여지껏 없었다. ‘환경운동사’는 과거에서 미래를 배우는 것이다. 과거를 정리함으로써 앞으로 좌표정리하는 데 공헌할 것이라 생각한다. 1980년대 환경운동이 민주화운동의 일부였다는 점은 우리에겐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른 나라와 비교해보면 일본은 주로 ‘피해자’ 중심으로, 미국은 ‘자연보호운동’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한국 환경운동은 정치·사회의 변화를 주도하는 거대한 역할을 맡았다.

최열 | 환경운동하면 역시 구자상 대표가 떠오른다. 초창기 운동부터 자세하게 말씀해달라.

구자상 부산환경운동연합 상근 공동대표(이하 구자상) | 대한민국은 서울중심 국가다. 역으로 지역에 문제가 집중돼 나타난다는 얘기다. 지역 대도시인 광주·대구·부산은 1인당 지역내총생산(GRDP)이 아주 낮다. 이는 지역민의 정치·사회·문화 환경의 열악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에 걸쳐 지역에서 폭발한 사건이 많다. 특히 부산은 환경운동에서 대규모 사건이 많았다. 직접 주민들이 환경권을 지키기 위한 움직임이다. 환경문제를 매개로 전반적 사회변화를 요구하는 민중투쟁적 성격이 짙었다. 민주화운동 출신이거나 사회운동 출신들이 이런 문제에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게 됐고 이게 계기가 된 것이다.

최열 | 시기가 민주화운동과 맞물려 있다. 운동가 상당수가 환경단체에서 일정 역할을 했다. 노무현 대통령도 부산공해문제 연구소 창립 이사다. 문익환·계훈제·백기완 등이 당시 (환경관련) 시위와 강연에 참여했다. 1982년 공해문제 연구소가 설립되면서 이돈명·한승헌·함세웅·김승훈·유인호 등 민주화운동 인사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환경운동을 반정부·반체제 운동으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식수오염 등 고통받는 이들을 위한 여론형성에 일정 역할을 했다. 언론도 관심을 두지 않을 때다. 삶과 직결되는 부분인데도 말이다. 전두환 정권 때 상당한 탄압을 받았다. 하지만 환경운동을 지켜냈다. 전문가가 아닌 젊은 대학생·대학원생 등 소장 학자들이 악조건에서 참여해 개척한 것이다. 초창기 환경운동하던 이들은 아직도 현장을 지키고 있다.

신동호 경향신문 NIE연구소장(이하 신동호) | 가까운 시기를 역사화하는 것은 쉽지 않다. 논란의 소지도 있다. 이를 고민하며 취재했다. 제목을 ‘환경운동사’라 하지 않고 ‘비록 환경운동 25년’이라 한 것도 이 때문이다. 말 그대로 숨겨진 역사다. 현장 취재를 했지만 자료가 없어 역사를 고고학처럼 발굴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독특한 시대상황 탓이다. 당시엔 압수수색도 받아 자료를 갖고 있으면 위험했다. 자료가 남을 수 없는 상황이었던 셈이다. 우리나라 환경운동은 아주 독특하다. 예를 들어 전두환 정권 때 모두 지하운동 펼칠 때 공해문제연구소가 1982년 설립돼 공개 운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실제로 1981년 12월이 맞다. 공해문제연구소를 통해 5공 최초 공개운동 단체라는 민청련이 결성되고 김근태 의장이 활동했다. 6월항쟁 후 민주화 운동이 분열됐는데 환경운동은 공추련으로 통합됐다. 환경운동은 항상 변화를 주도했다. 공추련이 한계에 도달했을 때 스스로 시민운동으로 전환했다. 환경운동연합으로서 건전하게 발전하는 모습도 드러냈다. 아시아 최대 환경단체로 설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이 모두가 혜안이었고 역사를 통해 볼 수 있었다.




이시재이시재 | 신 소장 말씀이 아주 중요하다. 환경운동이 민주화운동의 한 부분으로 간주돼왔다. 하지만 오히려 형식·양태를 선도했다. 정리해보면 현재는 그렇게 하고 있나 반성하게 된다. 어려운 조건에서도 역사적·인적 구성 갖고 있어 가능했던 일이다.

최열 | 부산지역은 울산도 있고 빠른 속도로 공업화됐다. 초창기 그쪽 분들도 적극적으로 이런 활동을 했는지 궁금하다.

구자상 | 부산은 낙동강 지표수를 대규모로 사용하는 유일한 곳이다. 다른 곳은 대부분 댐의 물을 쓴다.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에 걸쳐 강 하구 등에서 대형 토목사업이 벌어졌다. 이런 가운데 단체들이 생겨났다. 공감대가 형성되고 이런 것들이 전두환 정권 들어서며 새로운 시민운동으로 형성되는 계기가 됐다. 다른 지역처럼 새 리더도 등장했다. 그 시기에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사건도 있었다. 불길같이 문제가 제기되며 주민들이 전투적으로 들고 일어났다. 그러면서 운동이 빠르게 성장했다.

이시재 | 지역에선 공해에 따른 피해가 속출했다. 1960년대 말 울산에선 농작물 피해도 있었다. 경제 성장 속에서 민주화가 되지 않으니 필연적 과정이다. 주민 고통을 듣고 참을 수 없어 환경운동이 나온 것이다. 제도개혁을 넘어서 시민 권리와 복리를 찾는 것이 진정한 민주화운동 아닌가. 1980년대 민주화운동은 직선제 등 단순한 기치를 내걸었지만 환경운동은 질적으로 더 높은 것이 아니었나 싶다. 고차원적 목표가 있었고 지식인·학생 등이 사회전체를 위해 나섰다.

최열 | 열정을 지키고 정신을 공유한 이들이 나서 운동한 성과다.




신동호신동호 | 일본과 달리 우리나라에선 제3자가 환경운동에 뛰어들어 활동하기 쉬웠던 것 아닌가 싶다. 김지하 선생이 “당시 운동권에서 최열 대표 좋게 안 봤다”고 말할 만큼 안팎으로 공격당하기도 했다.

이시재 | 민주화운동이 분화되지 않았을 때는 일종의 (환경운동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됐다고 본다. 하지만 광주항쟁과 1987년 민주화항쟁 등을 거치며 분화되면서 그런 얘기가 나왔다고 본다.

신동호 | 배척받고 탄압받는 상황에서 당시 환경운동가들은 명예나 성과를 떠나 소신을 갖고 밀고 나가는 의지가 있었다.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노력들이 상당부분 관철되기도 했다. ‘안면도’ ‘매향리’ 등에서 나타나듯 한줌도 안 되는 환경운동가들이 도저히 변화시키지 못할 조건이었는데 이긴 게 많다.

이시재 | ‘환경을 파괴하고 지구환경 고갈시켜서는 지구가 계속 갈 수 없다’는 세계관이 나타난 뒤 소수라도 확신을 가진 이들이 나타났다. 이익을 추구했다면 권력을 쥐면 떠나게 된다.

최열 | 초창기 운동했던 이들이 지금도 지역운동에 관여하는지 궁금하다.




구자상구자상 | 지난 주 창립총회를 가졌는데 15년 이상 된 회원들이 꽤 많았다. 한번도 빠짐없이 회비를 낸 이들이다. 초창기부터 10년은 금세 지나가는 것 같다. 환경연합도 처음 10년 이상은 훌쩍 지나갔다. 초기에는 시민들이 회비 낸다는 개념이 없었다. 이후 임계점이 온다. 일시에 많은 회원들이 가입하는 때가 있더라. (운동의 성공을 위해) 시민들도 일정 역할을 해야 한다.

최열 | 초창기 상근자가 급여 받는 개념이 없었다. 공감대만 있으면 바로 ‘운동’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가끔씩 경찰이 집으로 들이닥쳐 끌고갔다.

신동호 | 공추련의 어떤 활동가는 이 때문에 아버지가 문패 옆에 ‘○○○ 출입금지’란 글을 써놓기도 했다. (전원 웃음)

최열 | 일단 가족들이 반대했다. 지금은 많이 좋아진 것이다. 1980년대에는 환경관련 강연을 하려 해도 장소를 구할 수 없었다. 그래서 명동성당에서 강연회를 했던 것이다. 그런데 울산에서 올라온 한 주민이 “서울은 공기가 좋네요. 나무가 사네요”라고 하더라. 곧바로 울산지역을 조사해 사회연대를 만들고 여론을 조성했다. 시민운동은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회원운동이 됐다. 또 실천운동이다. 이후 시민운동이 확산될 때 좋은 모델이 됐다. 1980년대 양김이 분열됐을 때 8개 단체가 모여 환경운동연합이란 대중운동으로 태동했다.

이시재 | 활동가들 고생한 얘기를 많이 해주셨는데 당시에 ‘활동가를 공채하자’는 제안도 있었다. 그때는 활동가 중심 조직이란 표현이 과언이 아니다. 이후 지역주민이 지원했다. 1992년 이후 시민들도 환경의식이 확대됐다. ‘활동가-시민’이란 도식이 생긴 것이다. 사실 초창기 학자들은 (환경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꺼렸다. 환경운동가들과 함께하는 것을 싫어했다. 하지만 환경운동연합이 활성화되면서 학자들도 몰렸다. 변호사 등 전문가들의 참여도 늘었고 운동은 강화됐다.

구자상 | 환경관련 석박사들의 역할이 너무 컸다. 정말 대중단체의 위상을 객관화하는데 도움이 됐다.

최열 | 사실 환경운동은 다른 노동·여성 운동보다 역사가 짧다. 젊은 사람들 참여가 많았고 대학·대학원 출신의 지식인들은 이후 교수가 된 사람이 많다. 20여 년이 지나니 달라진 것이 참 많다. 내가 가장 연금을 많이 당한 사람인데 이제는 경찰·국정원에서까지 “좋은 일 한다”며 강연해 달라고 하더라.

이시재 | 일본에는 환경운동 연표도 있다. 영어로도 나왔는데 펼쳐보면 각종 소사까지 자세히 알 수 있다. 부러운 일이다. 1980년대 환경운동은 민주화운동에 동력을 받고 함께 갔다. 동력 받아 함께 클 수 있는데 새로운 이데올로기, 새로운 동력을 만들어내야 한다.

최열 | 최근 어린이 (환경)교육도 하는데 입시 때문에 맥이 끊긴다. 예를 들어 초등학생과 고등학생을 놓고 똑같은 질문을 던지면 초등학생이 훨씬 더 많이 안다. 교육인적자원부가 모든 부분을 통제·간섭해 후퇴한 것이다. 지역 특성에 맞는 교육을 해야 한다. 생명운동도 더 창의력이 필요하다.

구자상 | 공해문제연구소는 민주화운동의 위장막 구실도 했다. 그런데 환경운동에서 최열 대표의 지도력과 상상력이 너무 커 지역이 이를 못 따라가는 면도 있다. 환경운동은 지역화·내재화해야 하는데 획일화되는 단점이 있다. 부산에선 나름대로 지역에 맞는 그런 운동을 추구한다.

최열 | 신 소장께서 50회를 연재하셨는데 ‘이런 부분이 아쉽다’는 이런 것도 있을 것이다.

신동호 | 처음에는 50회 연재하면 환경운동 역사가 그리 길지 않아 충분히 담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한 12년치를 정리하면서 빠뜨린 게 너무 많다. 지역주민 운동 등을 지역별로 자세히 다루지 못했다. 큰 사건이나 상징성 있는 부분만 다룬 것이 아쉽다. 앞으로 운동사에 대한 인식이 중요하다. 과거는 미래의 거울이다. 어떻게 가야 할지에 대해 현실과 미래가 결부된 그런 부분 아닌가. 활동가들은 중요한 현안도 많겠지만 기록문제도 소홀히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지금은 여러 가지 기록이나 역사를 정리하기 참 좋은 조건이다. 환경운동은 책임있는 사회적 자산이다. 의미 부여가 잘된 것 같다.

구자상 | 역할 정리라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대단히 고맙다. 소홀히 할 수밖에 없는 측면을 정리했다는 건 앞으로의 운동 위해서도 대단히 중요하다.

최열 | 시간이 지나면 다시 연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일단 연재된 50회분은 올 4월 지구의 날에 다시 정리해 2권의 책으로 출간할 예정이다. 시민들의 환경에 대한 관심을 키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드라마라고 생각한다. 영화로 제작해도 좋을 것이다. 우리나라 환경운동의 역동성을 보여주고 싶다.

구자상 | 울산 태화강에는 다시 연어가 돌아와 축제도 하고 그런다. 당시에는 공해백화점이라 불리며 그런 데는 관심도 없었다. 정파를 초월해 환경생태도시 울산이란 슬로건을 내세운다. 우리 사회의 순환동력으로 만드는 것이 과제다.

최열 | 마무리하면 언론이 뉴스 전달 외에 이렇게 우리 운동사를 다시 정리하는 노력을 한다는 것도 의미있다. ‘뉴스메이커’가 환경운동을 하는 사람에게 큰 역할을 했다. 우리도 21세기 환경운동 방향을 어떻게 운동적으로 모아낼지가 과제다. 이번 연재가 다른 어떤 것보다 도움이 되고 힘이 됐다. 감사드린다(박수).

<정리/오상도 기자 sdoh@kyunghyang.com>
<사진/김세구 기자 k39@kyunghyang.com>

원문보기:
http://m.weekly.khan.co.kr/view.html?med_id=weekly&artid=13727&code=115&fbclid=IwAR0Pga6vZX6STmPO6ChtFdEx3rfBcB_XnYYLV9t6T0jNTCpvK7GEdjjpNBI#c2b#csidxfca207f4c21af2d809f65310168c2a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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